음미하고픈 詩

시모음

그령58 2007. 2. 16. 09:34
 

거리에서 / 김신영


 내 마음 하나 비우지 못해 길을 걸었다 유쾌한 아낙네들 거리에 쏟아져 있고, 남 모르는 햇살을 간직한 채 미쳐 우는 바람은 아직도 내 곁에. 시계는 갔다 그저 제가 가르치고 싶은 지침은 하나도 못 가르치고 내 시계는 갔다 사랑이 찬란한 빛을 잃었듯이 마음은 흘러가고 있었다 누구든 머무는 바람을 안다면 내게도 좀 가르쳐다오 나아 그를 만나 떠다니지도 않을 곳에서 내 마음의 꽃들 걷어내고 싶어 파리의 보헤미안처럼 파가니니의 협주곡 하나쯤,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같은 저음의 고요를 하나쯤 간직하고 아무도 없는 섬에서 조금만이라도 살 수 있다면 내 그리움 사무치는 파도에 휩싸이는 여름을 보내고 나면 비바람이 그칠는지 골목길에 떠드는 아이들의 웃음으로 내 그리움 훌훌 털어낼 수 있다면 더 슬픈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된다면 끝없이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 없어도 된다면 나아 그 길에 있고 싶어 그 길에 내 노래 하나 무덤을 만들어놓고 무심하게 앉아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건강한 슬픔 / 강연호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이라는 안부를 건넬 틈도 없이

그녀는 문득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저 침묵했다

한때 그녀가 꿈꾸었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니었다

나도 그때 한 여자를 원했었다 그녀는 아니었다

그 정도 아는 사이였던 그녀와 나는

그 정도 사이였기에 오래 연락이 없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는데도 서로 멀리 있었다


전화 저쪽에서 그녀는 오래 울었다

이쪽에서 나는 늦도록 침묵했다

창문 밖에서 귓바퀴를 쫑긋 세운 나뭇잎들이

머리통을 맞댄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럴 때 나뭇잎은 나뭇잎끼리 참 내밀해 보였다

저렇게 귀 기울인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로

바람과 강물과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리라

그녀의 울음과 내 침묵 사이로도

바람과 강물과 세월은 또 흘러갈 것이었다


그동안을 견딘다는 것에 대해

그녀와 나는 무척 긴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

아니 그녀나 나나 아무 얘기도 없이

다만 나뭇잎과 나뭇잎처럼 귀 기울였을 뿐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나보다는 건강하다는 것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울음을 건넬 수 있다는 것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

그녀는 이윽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서야 나는 혼자 깊숙이 울었다

 

바퀴벌레의 집 / 이창수


 벽에 사는 바퀴벌레 , 천장과 벽이 만나는 아슬아슬한 이곳이, 그의 집이다. 추락하기 쉬운 지점에 그의 생활이 있다. 내 시선의 가장 불안한 곳에 사는 이놈, 시집 한 권을 뽑아들고 다가가니. 벽에 난 미세한 틈, 자신의 몸보다 좁은 균열로 몸을 숨긴다. 균열 속에 사는 바퀴벌레의 집. 너무도 추락하기 쉬운 곳에 있다.



물방울 / 이승희                    


 물방울은 왜 모여지는 것이 아니라 맺혀지는 것일까?  맺힌다는 그 말 속 들어 있는 단단한 뼈 같은 마디들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하나의 맺힘이 있기까지 그 오랜 습기의 기억들은 어느 바람 속, 어느 쓸쓸한 저녁의 이름으로 돌아온 것일까. 얼마나 사무쳤기에 저리도 둥글어진 것이냐. 물방울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다. 그러므로 사랑은 물방울이 다른 물방울을 만나는 것처럼 그런 것이어야 한다.


육탁(肉鐸) / 배한봉

  

 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 같다

 더 이상 칠 것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 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육탁을 치는 힘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바닥 치면서 알았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들었으리라

 누군가를 오래 기다린 사람의 집 창문도 저렇게 늘 열려서 불빛을 흘릴 것이다

 지하도에서 역 대합실에서 칠 바닥도 없이 하얗게 소금에 절이는 악몽을 꾸다 잠깬

 그의 작고 둥근 창문도 소금보다 눈부신 그 불빛 그리워할 것이다

 집에 도착하면 캄캄한 방문을 열고

 나보다 손에 들린 검은 비닐 봉지부터 마중할 새끼들 같은, 새끼들 눈빛 같은








행운목 / 유홍준


행운은 토막이라는 생각


행운은- 고작

한 뼘 길이라는 생각


누군가 이제는 아주 끝장이라고


한 그루 삶의

밑동이며 가지를 잘라 내던졌을 때

행운은 거기에서 잎이 나고 싹이 나는 거라는 생각

잎이 나고 싹이 나는 걸

발견하는 거라는 생각

그리하여 울며 울며 그 나무를 다시 삶의 둑에 옮겨 심는 거라는 생각


행운은, 토막이라는 생각


행운은- 집집마다

수반 위에 올려놓은 토막이라는 생각


 「애지」 2006년 여름호



천공의 성(城)라퓨타 / 박해람


  동사무소 이층 복지회관 러닝머신 위를

  몇 명의 여자들이 걷고 또 걷는다

  넓은 통유리가 마치 일생의 한 화면 같다.

  아침까지 갔다가 다시

  통유리의 넓은 저녁으로 돌아오는 유영

  38, 29, 50, 17, 다양한 나이와 문수의 걸음들이 걷고 또 걷는다

  아무 목적지도 없는 걸음

  다만 몇 킬로의 또는 몇 그램의 일생을 줄이며.


  라퓨타. 가끔 구름 속을 나와 유영하는 성(城)

  어디에도 없는 내 몸에 꼭 맞는

  내 몸을 찾는 사람들

  둥둥 떠서 아니, 둥둥 걸어서

  끊임없이 걷고 또 걷는

  그러다 남편의 귀가 시간이라는 역에, 끼니때라는 지상의

역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걷고 또 걷는.

  앞도 뒤도 없이

  그저 흘러갈 뿐인 풍경

  지상에서 망가진 것들의 구름 같은 오후를

  가는 일도 없고 되돌아오는 일도 없는

  그자 유영하는 저 악착같은 걸음들,

  둥둥 떠가는 동사무소 이층 천공의 성

  타이머에 맞추어진 길의 시간을 걷고 또 걷는

  단 한번도 지상에는 내려서지 않겠다는 듯

  러닝 벨트 위를 규격품처럼 걷고 또 걷는,

  불쌍한 승객들.


 시집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 2006년 랜덤하우스중앙


이런 쌍년 / 박건호


신쥬쿠 가부끼쪼는 도쿄에서 유명한 환락가

극장 술집 빠찡꼬 가게들이 저마다

휘황한 불빛들을 앞장세워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날 내가 권 선생을 따라 한국 클럽으로 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절반은 쪽발이가 다 돼 버린 어느 동포 아가씨가

다 마시지도 않은 잔에 자꾸 술을 따른다.

"아가씨, 우리 나라 풍습에는 제사 지낼 때나 첨잔을 하는데?"

"여기는 일본이에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잖아요?"

"아니, 그 말을 꼭 이런 데 적용해야 하는 거요?"

(아가씨는 그 말에는 대답도 않고 담배를 한 개피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나는 멋쩍어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가씨, 서울에 사는 외국인들이 우리 한국의 방식대로 살지 않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 사람들이 뭐가 답답해서 그까짓 한국의 방식을 따르겠어요?

촌스러운 한국의 방식을……."

아아, 나는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그녀의 말을 듣자

“이런 쌍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가슴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그냥 참아야 했다.

어쨌든 그녀는 조국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못 가르친 조국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팽이 / 김선태


팽이가 도는 것은

누군가의 채찍질이 있기 때문이다

조무래기들의 채찍질까지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따악 따악, 아프게

매 맞으며 조금씩 제 몸 일으켜 세우는 팽이

끊임없는 채찍질로 정신이 뜨여 빠르게 돌더니

마침내 스스로 도는 줄도 모르고 멈춰 선 지점


저 무아지경의 황홀한 천착

저 꼿꼿한 자립(自立) 또는 자존(自存)


그리하여 팽이는, 천형의 팽이는

울음소리도 어지럼증도 미동마저도 없이

팽팽한, 한 송이 고요를 피워 올리는 것이다

잠깐, 세계의 숨통을 바짝 조이기도 하는 것이다



손 / 마경덕


 일찍이 죄 많은 손이었다. 소금자루처럼 무거운 등에 업힌 막내, 엄마 몰래 동생을 꼬집던 죄와 함께 자란 손, 개를 키워 개장수에게 팔고 목줄 끊고 도망쳐온 개를 쇠줄로 묶어 돌려보냈다. 저를 팔아넘긴 주인에게 돌아와 꼬리 치며 얼굴을 핥던 똥개. 끌려가며 찔끔찔끔 오줌도 지렸다. “내 다시 개를 키우면 개새끼다.” 다짐한 개만도 못한 손, 다시 개를 먹이고 배 떨어진 강아지를 내다 팔았다.


 개 패듯 여편네를 두드리고 밤새 화투짝을 쥐고 놀던 옆집 최씨, 집 한 채 말아먹고 시퍼런 작두로 엄지 하나 찍어내고, 다시 손가락 네 개에 화투를 끼우고 노름판에 떴단다. 다들 ‘개 같은 놈’이 라고 손가락질 했다.


 지하철 손잡이가 꺼림칙하다. 별의별 손이 스쳐갔을 손고리에 선뜻 맘이 닿지 않는다. 먹지처럼 까만, 죄 지은 손이 두려워하는 게 고작 지하철 손잡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