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미하고픈 詩

삭힌 고추

그령58 2006. 9. 16. 00:11

삭힌 고추 / 노희정

               
아삭아삭 씹힌다
언니의 삼십 년 세월이
시어머니 모시고 세 남매 낳아
가난한 가정을 꾸려 온 넷째 노서운 언니
찌든 손으로 들었다 놓았다 만지작거린 고추
시집살이처럼 시큼하고
알뜰한 살림처럼 짜고
올망졸망 가족사랑처럼 달콤하게 간식처럼 먹던 고추
넷째 언니의 삶을 식초 간장에 푹 삭힌 고추
한때 풋고추처럼 싱싱했을 언니의 푸릇푸릇한 청춘
한 시절 파랗던 고추가 이제는
항아리 속에서 누렇게 변해가고 있다
설거지하고 서 있는 언니의 모습은
짜디짠 눈물의 소금기에 푹 절여져 있다
셀 수 없는 긴 세월
언니의 삶도 갯물에 조금씩 씻기어 갔다
푹 삭힌 고추를 꺼내
얼마 전 평생 걸려 지은 집
햇살 좋은 발코니에서
두 내외는 정답게 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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